《또 다른 물성》 전시 리뷰 II : Part 1
차곡히 쌓아간 작업의 순간들을 눈으로 쫓다
문헌관 3층 박물관 전시실 <또 다른 물성>展
민정범(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도예유리과 재학)
유달리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는 그림의 자취들이 있다. 작품을 마주한 우리들은 그러한 자취들을 눈으로 따라가며 작가의 오랜 숙고의 순간들을 쫓는다. 작가의 자취는 캔버스 위를 아득히 수놓은 획들을 통해, 혹은 조각에 새겨진 질감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이유에서 작품의 물성을 작가의 생각을 감상자에게 감각적으로 전달해 주는 매개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성’은 사물 고유의 특성과 특징을 가리키는데,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표현할 사물을 찾아 작품에 표출한다. 작품에는 물성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의미가 더 확장되기도 하며 관객에게 울림을 준다. 홍익대학교 박물관에서 6월 21일(수)부터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물성>展은 한국의 근현대 작가들의 물성에 대한 모색을 보여주는 기획전이다.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작품을 통해 작가들이 물성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선 그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박물관의 소장품 22점을 처음으로 공개하기 때문에 더욱 유의미한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전시장의 오른 편으로 들어서면 최명영과 서승원의 투명하고 평면적인 기하학적 추상회화가 보인다. 놀랍도록 투명한 색채를 보여주면서도 형태적으로는 명료한 이들 작가의 작품은 캔버스 표면에 얇게 발린 유화 물감을 통해 구현된다. 우윳빛으로 매끈하게 빛나는 캔버스의 표면에서는 어떠한 질감을 유추하기 힘들며, 현대적인 그래픽 디자인을 연상시킨다. 이들 작가의 투명한 기하학적 추상회화는 산업 사회로의 변화 속에서 나타난 새로운 미감에 대한 추구로 이해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서승원의 <동시성74-9> 왼편에 전시된 하종현의 <접합79-99>은 극명하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접합79-99>에서는 작가가 택한 독특한 재료인 마포천이 주는 강렬한 질감이 도드라진다. 마포는 올이 굵고 거친 천이라는 특징이 있는데, 작가는 마포천 위에 물감을 두텁게 발라 흘러내리게 하여 거칠고 투박한 재료가 주는 물성을 극대화했다.
특징적인 획의 사용을 통해 물성을 드러낸 작품들도 눈에 띈다. 작가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캔버스 위의 획을 통해 물성을 거침없이 드러내곤 했다. 박서보의 <묘법 No-1.72-73>는 그의 초기 묘법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유백색의 표면에 반복적인 획을 그려 넣어 차분한 수양의 자세를 보여준다. 사각형의 정제된 형태 내부에 그려진 자유로운 필치는 깃털이 가볍게 흩날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건용의 의 방법>은 연필로 그려진 가는 선들로 이뤄진 드로잉인데, 작가의 표현법에 대한 꾸준한 모색을 보여준다. 한편 김태호의 <내재율 96>은 아크릴릭 물감을 두텁게 겹쳐 발라 한층 무겁고 견고한 느낌을 자아낸다.
때로는 작가가 사용한 재료가 익히 알려져 있는 느낌이 아닌 전혀 다른 재료의 물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함섭의 는 유화로 수없이 많은 뾰족한 획을 그려낸 작품으로, 섬세한 표현 덕에 철판을 뾰족한 도구로 긁어낸 것처럼 보인다. 한편, 지금까지 한국 미술사에서 많이 조명 받지 못했던 여성 추상 회화 작가들의 작품들에서도 명료한 획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윤미란은 <정. 화음>에 화선지 위에 수직선과 수평선을 반복적으로 그려 넣어 창호지 같은 느낌을 주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선의 궤적을 눈으로 따라가며 작가의 표현에 대한 끝없는 모색을 엿볼 수 있다. 진옥선의 는 가느다랗게 선을 통해 기하학적인 도형을 그려 넣은 작품으로, 반복적인 형태의 중첩을 통해 율동감을 자아냈다.
회화에서 캔버스 위의 물감의 궤적을 통해 물성이 드러난다면, 조각은 그것을 이루는 철, 알루미늄, 나무 등의 사물 자체에서 특유의 물성이 드러난다. 박중배의 <역사의 원2>는 철로 제작되었음에도 살아 숨 쉬는 듯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견고한 철을 양쪽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긴 듯한 표현과 표면 위에 새겨진 섬세한 따개비 모양의 질감은 무생물이 아닌 하나의 유기체를 마주하고 있다는 착각을 자아낸다. 한편, 철판 위에 돌이 지나간 궤적을 거울로 나타낸 박현기의 <무제>는 이질적인 재료들이 공존하는 상황을 통해 사색할 수 있는 풍경을 선사한다. 동, 대리석과 같은 단단한 재료를 이질적인 부드러운 모습으로 표현한 노재승의 <흘러내리는 력>과 전국관의 <적-수직, 율동> 또한 주목할 만하다. 기존의 사물에서 연상되는 단단한 물성이 아닌 극명히 대비되는 부드러운 물성을 표현함으로써 모순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한국의 근현대 미술은 한국의 시대적 흐름과 국제적 미술계의 변화 속에서 복합적으로 전개되었다. 전시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시대를 넘나들며, 작가들이 저마다 고민했던 물성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작가들이 추구한 미학적인 예술관은 저마다 달랐지만, 이들이 물성의 실험을 통해 고유의 표현법을 찾고자 했던 것은 공통적인 사실일 것이다. 홍익대학교 박물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11월 17일(금)까지 개최된다. ‘홍익대학교박물관 기획 비평 아카데미: 전시를 만들어 나가는 대화’, ‘소장품 연구 지원 프로젝트’ 등 다양한 전시 연계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전시에 대해 많은 관심을 희망하는 바이다.